이어령의 작은 종탑
이어령 선생의 세례는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철갑의 논리로 무장한 지식인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었으니, 사계의 충격은 대단했다. 뒷말도 많았다. 세례식이 무슨 대관식처럼 보였다, 교회 출석도 않으면서 유명인사라고 특혜를 받느냐, 딸에 이끌린 것일 뿐 스스로의 신앙이 없다, 매스컴의 지나친 조명이 부담스럽다…. 일본에서 한국기자들과 가진 회견 또한 사변적인 수사가 치렁댔다.
그러나 그는 세례 전부터 마음 속에 작은 믿음의 종탑을 짓고 있었다.
지난달 초 ‘미술품 감정’을 주제로 한 고미술 문화대학 강연장에서 그는 “미적 가치와 시장 가치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 전문가들의 역할”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면서 말미에 이런 말을 했다.
“가치와 가격은 다르다. 가장 존귀한 것은 값이 없는 법, 물이나 공기가 그렇지 않은가. 재벌과 서민은 같은 공기를 마신다. 신은 절대적인 면에서 공평하다는 증거다.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인문학자로서는 이례적인 발언이어서 장내가 잠시 술렁였다.
고백은 비슷한 시기에 열린 저작권 포럼에서도 나왔다. 레식, 스톨먼, 레이먼드의 최신이론을 소개하는 등 전문가 뺨치는 실력을 뽐낸 그는 “나의 저서 100여권 가운데 인세 들어오는 것은 5, 6권뿐”이라며 지식의 독점을 경계한 뒤 느닷없이 “알파벳 G자 크게 쓰는 그 분만이 저작권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설파했다. 학술 세미나에 적절한 말은 아니로되, 그로서는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의 믿음은 2004년 일본 교토에서 지은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에서 싹텄다고 볼 수도 있다.
인터넷을 통해 회자되는 그의 시는 이미 유신론자의 아름다운 연서의 모양을 갖췄다.
“하나님
당신의 제단에 꽃 한 송이 바친 적이 없으니 절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에는 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너무 적적할 때 아주 가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립니다
(중략)
좀 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하나님
당신의 발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자락을 때 묻은 이 손으로 조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리고 그것으로 저 무지한 사람들의 가슴 속을 풍금처럼 울리게 하는
아름다운 시 한 줄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아직도 부족하면 CGN-TV를 통해 그의 딸 민아씨의 간증을 들어보라.
자식과 손자의 고통에 기꺼이 동참하는 어버이의 모습을 보면 더 이상 그의 믿음을 회의할 수 없다.
나이 일흔셋, 멀리 모퉁이 길을 느릿느릿 걸어온 교만한 현자, 그를 따뜻이 환영하는 것이 신앙인의 몫이다. 그러나 공짜는 없다.
그래서 주문하건대, 그 통섭의 식견과 성찰로 빚어낸 저작 하나를 남겨달라는 것이다.
버틀란트 러셀이 80년 전에 발표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극복하는 명문을 읽고 싶다.
그만의 종탑에서 빚어낸 기도문이거나, 가슴 속을 풍금처럼 울리게 하는 시는 어떠하며,
영성의 우물에서 길어올린 에세이도 좋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서 발견하고 사유한 그 분에 대한 기록은 이어령 불후의 명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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