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헌금은 구제와 나눔으로- 왼손 모르게*
올해도 저희 교회는 성탄헌금을 온전히 구제와 나눔에 사용하였습니다.
매달 선교헌금에서 고정적으로 송금해드리는 곳 외에 평소에 돌보지 못했던 이웃과 나눔을 하면서 예수님의 성탄을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자는 의미이지요.
특히 요 몇 년동안은 코로나 질병으로 인해서 갑자기 생활이 어려워진 이웃님들이 너무나 많아서 어떻게 할 줄을 모르겠어서 조금 고민을 하다가 목사님께 금액도 그리 많지를 않으니 우선 우리 교회 안에 우리 식구들을 챙기고 돌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상의를 드렸어요. 그래서 조금 마음이 편안해졌구요. 저도 목회자 아내이기 때문에 가족들 모르게 챙겨야 할 곳이 더러 있어서 탈탈 털어 빈손이 되어버렸답니다. 봉투에는 [왼손 모르게]로 적어서 가만히 찔렀습니다. 하하
저는 가난한 목회자의 아내이기 때문에 제 수중에 현금이 많지를 않아요. 시간을 쪼개 약간의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쥐꼬리만큼 살림에 보태려고 하는 일이기 때문에 늘 쪼달리는 편이에요. 그런데 제가 이런 블로그를 하다보니 조금 곤란한 일이 가끔 생기네요. 제가 글을 올리면서 허풍을 떨었나요? 잘난 척을 했나요? 비밀글로 도움을 달라고 하는 분들이 가끔 계셔요. 그러면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몇 날 며칠 혼자서 끙끙대다보니 블로그에 들어오는 것조차 두려워 잠수탄 적도 있었어요. 물론 답글도 못드렸어요. 핑게처럼 변명처럼 들릴 것 같아서요.
힘든 분들이 이웃에 넘쳐나서 저도 마음이 우울해진 연말이었습니다. 두루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주님께서 아픈 곳 빈 곳에 사랑으로 채워주시기만을 빌겠습니다.
아래 글은 제가 수 년전에 다른 매체에 글을 써서 드린 글이 저장되어 있길래 올려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다 남모르게 죽어나가는 이웃이 너무나 많습니다.
행정 민원 복지과에서 지역주민들을 위해서 봉사하거나 도와주는 일이 있는지 정기적으로 조사하는 일이 있습니다. 참으로 민망한 것은 우리도 병아리 눈물만큼 도와주면서 누구누구를 이만큼 도왔노라고 보고해 올리기가 사실은 너무 부끄럽습니다.
교회마다 규모가 다 다르고 독립적으로 운영이 되기 때문에 교세가 큰 교회는 많은 물량으로 다방면으로 도울 것이고 우리처럼 약한 교회는 형편에 맞게 내 교회내 아이들을 돌보는 일들이 우선인데.. 그걸 꼭 통계에 집어넣어서 문서화하라니 참 답답합니다. 아직 영세한 교회들에게는 복지라는 단어보다 구제라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만 교회가 이웃의 배고픔과 아픔을 나눌 줄 알아야 한다는 교리의 특성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어서 노숙자들이나 어려운 이들도 요즘은 너무나 당당하게 교회를 순회하면서 끼니를 해결하고 있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사회전반적인 인식이 한국교회 즉 개신교가 양적인 팽창에만 신경을 쓰고, 사회참여는 무관심했다는 비판을 많이 받아 왔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주로 교회의 총 예산 중에서 사회복지로 활용되어지는 비중이 너무 낮지 않냐는 인식에서 출발하는데요. 그러나 무조건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제가 목회일선에 계시는 분들 곁에서 들어보니 알게 모르게 즉, 성경말씀을 받들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돕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꼭 숫자나 통계만을 앞세워서 비판하기엔 좀 불만스럽습니다.
왜냐면 교회는 그 시작에서부터 가난한 자와 병든 자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양과 염소를 가르듯 사람들을 가른 뒤에 오른편 사람들을 향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고 말씀하실 것이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언제 그렇게 하였느냐고 반문할 때 하나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 25:31-46)고 설명하셨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가르침 중 핵심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며,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가 구제와 봉사에 열중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들어올 때에도 선교사들이 했던 일이 우선 빈민구제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내 힘으로 일어설 수 없을 때에는... 지치고 힘겨운 삶에 대항이라도 하듯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자식을 던지고 함께 투신하는 몹쓸 일이 주변에 자꾸만 일어나고 있는데도 강건너 불보듯 그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인지. 도움을 요청할 만한 곳이 그렇게도 없었을까요?
그 이웃들은 그 가정의 절망을 정말 전혀 몰랐을까요? 우리사회가 이만큼이나 비정해졌다는 말인가요? 가난은 나랏님도 못 구하니 그저 본인들이 알아서 하란밖에 한 개인의 일로 국한시킬 수 밖에 없나요? 혹시 모르시지는 않나요? 내 힘으로 일어설 수 없을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것도 용기임을 말입니다.
자식을 부등켜안고 컴컴한 방에서 몹쓸 짓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어딘가에 한번 기대보는 건 안될까요? 혹시 이러면 또 어떻겠습니까? 도저히 일어설 기력조차 없어 삶을 포기하고 싶어질 땐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이를 생각해보는 일 말입니다. 나를 낳아준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려보고 그분들의 자랑스러운 자식이었을 때를 떠올려 봄은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안되면 나를 통해 세상을 보는 자식들의 선한 눈망울을 생각보는 일은 어떻습니까.
그래도 안되면 신앙은 없더라도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목청껏 불러봄은 어떻겠습니까? 그분은 無에서 有를 창조하신 분이고 나를 만드신 분이기에 나를 가장 잘 알며 나를 어찌해야 하실건지 이미 결정해놓으신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내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 하고 아직은 그 분을 거부하고 그 발아래 굴복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지는 않습니까? 지금의 나도 그렇거니와,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서성이며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마지막을 선택할 권리가 우리에겐 없습니다.
죽기 전에 한번만 더 자존심을 버리고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보십시오. 살 이유가 있고 살 방법이 있고 분명히 살 수 있는 날이 있습니다. 반드시 오늘과는 분명히 다른 내일이 있을거라고 믿는 내 안의 나와 나의 이웃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제발..
어쨋거나 딴세상 속한 이야기말고 이 땅에 돈 없는 연고로 소외받는 계층,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한 도움의 손길이 불특정 다수에 의해 공급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소득층의 의료혜택이나 최저생활을 보장해주는 더불어 잘사는 진정한 복지국가가 되게 하겠다고 외치고 또 외치는 허공을 때리는 소리말고 제도적으로 뒷받침될 수 있는 정책들이 많이 마련되어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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