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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사모님

창세기 17장 - 아브라함도 웃었고 사라도 웃었는데요?

by 설익은사모 2023.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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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7장 - 아브라함도 웃었고 사라도 웃었는데요?

 

창세기 17장에서는 아브라함이 웃었습니다. 

아브라함이 99세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이르시되 아들을 주겠다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 17장 17절에서 19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오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창세기 18장 9절에서 15절에 보니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웃었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舊, 낙)이 있으리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오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17장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참으로 친절하신 느낌이 들고

18장의 하나님은 사라에게 좀 엄격하신 느낌이 드는 것은 여자로서의 자격지심일까요?

너무 믿을 수 없는 말씀에 쉽게 믿어지지 않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잖아요.

자식 보는 걸 포기하고 몸종 하갈까지 첩으로 내어 준 마당에요.

 

차이점을 발견하려고 다시 꼼꼼히 살펴 읽으며 묵상합니다.

17장에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17장 전반에 걸쳐 순종하는 모습을 실천에 옮깁니다.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창 17:27)

 

18장에 마므레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또 여호와께서 나타나십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온 세 사람을 지극정성으로 영접하고 섬기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봅니다.

장막에 있는 사라에게 일러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고 하고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요리하게 하고

아브라함이 직접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들은 식사를 마친 후에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사라를 찾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사라는 아직 불신앙가운데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다고 했을 때 아멘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속으로 웃었습니다.

이유는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2절에 보면 사라의 말속에는 부정적인 불신의 단어들이 충만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웃고"  "노쇠하였고"  "늙었으니"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라에게는 불가능에 대한 확신으로 충만해있습니다.

사라는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며 불가능한 자신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내게 예수 믿은들 무슨 낙이 있겠느냐"라고" 말합니다.

 

"아이를 낳는다면 벌써 낳았겠지.. 이제.. 무슨 아이냐! 내 나이가 몇 살인데.."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으로는 낙이 없는 사람들입니다.(무슨 낙이 있겠느냐?)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면 새로운 낙이 생깁니다.

그런데 사라는 하나님은 믿었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습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예배는 드리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믿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드리지만, 기도는 하지만, 생각이 많고 늘 불안합니다.

주여! 하면서도 외롭고, 주여! 하면서도 번뇌로 충만합니다.

불신 가운데 있는 사라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속이 타십니다.

왜냐하면, 이제 응답과 약속의 성취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 없는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속은 타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하심에 속이 탄다고 거꾸로 말합니다.

 

14절입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아들이 있으리라"

 

그렇습니다.

응답과 성취를 위하여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1. 하나님의 능치 못하심을 의심 없이 믿는 믿음의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2. 믿음의 그릇을 준비해도 때가 되어야 합니다. (기한이 이를 때에) 

그런데 그때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시며, 내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입니다.

 

3. "사라야 아들을 낳으라"가 아닙니다.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입니다.

하나님이 낳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아이를 낳는 주체가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할 일은 그냥 믿기만 하고 기다리면 됩니다.

"아들을 낳으리라"는 말씀이 낳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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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전능자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막에서 꽃피게 하며, 반석에서 물 나게 하시며,

광야에서도 메추라기를 날아오게 하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 속에 오셔서 말씀하시며 함께 고통을 나누시는 분입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능치 못하심 앞에서 웃었습니다.

겉으로는 안 웃었지만 속으로는 웃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아멘입니다.

겉으로는 "믿습니다"입니다.

불안하고 많은 생각으로 번뇌케 하는 인간적인 믿음에서 하나님의 믿음으로 승화시키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믿음을 가지고는 어떤 노력으로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때가 아브라함이 변하기 시작한 때입니다.

할례를 받고 거룩을 회복한 때입니다.

  

다시 18장 14절 말씀을 외워봅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아들이 있으리라"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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