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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합니다

성경묵상 2

by 설익은사모 2005.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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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 2

 

 

1. 해석과 적용에 대해서


오늘도 제가 오늘 묵상한 것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그런데 좀 다르게 한다고 했지요?
첫시간에 제가 묵상한 것을 소개할 때는 주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을 ‘적용’(application)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사실 그렇게 적용하기 전에 ‘해석’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물론 의도적으로 본문을 다 해석하고 나서 그 다음에 적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신문을 읽거나 책을 읽을 때, 혹은 눈으로 TV를 보거나 귀로 라디오를 들을 때, 도대체 책 속의 등장인물이나 저자나 혹은 미디어 속의 출연자들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들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예를 들면,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 정치인들과 관련한 뉴스를 듣고는 “저런 못된 녀석들, 이번 선거에서 내가 찍어주나 봐라” 하고 반응하지요. 훈훈한 미담을 듣고는 “야, 세상에 아직도 저런 사람이 있네. 지금 당장 ARS로 전화해서 좀 도와줘야지”라고 반응하기도 합니다. 앞엣것(‘저런 못된 녀석들’ ‘야, 세상에 아직도 저런 사람이 있네’)은 해석이고 뒤엣것(‘이번 선거에서 찍어주나 봐라’, ‘ARS로 전화해서 좀 도와줘야지’)은 ‘적용’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할 때 우리 자신의 생각이 그대로 반영된다고 했지요? 요즘 대통령 측근들의 비리를 보면서도, 여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수백억씩 해먹은 녀석들은 가만 두고 수 천 만원 가지고 저렇게 난리냐? 저만큼도 안 받고 어떻게 선거를 치루나’라고 동정하고, 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젊은 녀석들이 권력을 쥐더니 돈에 눈이 멀었구먼’하고 반응합니다. 같은 축구 경기를 봐도 지지하는 팀에 따라 경기에 대한 평가도 달라집니다. 설사 기자나 전문가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전 관전평이 똑같은 경기를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다르다고 틀린 것은 아닙니다. 저마다 그 경기의 진실을 한 면 쯤은 반영하고 있으니까요.

이렇듯 우리가 ‘의도하지 않아도’ 우리는 성경 본문을 대할 때도 ‘해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것이 우리가 아무 수고를 하지 않아도 다 깨닫게 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좋은 해석과 나쁜 해석이 있을 뿐, 해석 없는 적용이란 말은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다른 책을 해독할 때처럼 성경을 해석하는 데도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원리가 있습니다. 그 원리들을 미리 잘 알고 성경을 해석할 때 사용하면 더욱 넓고 깊게 본문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묵상을 할 때 늘 꼼꼼하게 해석을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껏 성경을 볼 때 사용해왔던 일반적인 원리들을 가지고 평소 몸에 밴 대로 해석하시면 됩니다. 좀더 해석을 엄밀하게 하는 훈련은 다른 기회를 통해서 하고 개인적으로 성경묵상을 할 때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즉 ‘적용’(application)에 더 주안점을 두길 부탁드립니다.

2. 누가복음 13:18-30의 적용과 해석


그렇다면 오늘은 본문을 적용할 때 제가 어떻게 해석을 하였는지를 보여드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제가 묵상한 것을 소개하고, 그 대신 적용은 조금만 나누겠습니다.


A. 문맥의 중요성

오늘 본문은 어제에 이어서 누가복음 13:18-30입니다.
본문을 읽을 때 어제 본문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염두에 두시면 좋습니다. 누가복음 저자가 앞뒤도 안 맞는 이야기를 임의로 배치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서 이 사건을 ‘선택’하였고, 이런 순서로 ‘배열’하였으며, 이런 식으로 ‘묘사’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선택’, ‘배열’, ‘묘사’는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어제 이야기는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서 1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내용이었습니다. 회당장이 안식일에 일했다고 비난하자 예수님은 안식일에 짐승들에게는 자비를 베풀면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은 허락하지 않는 그의 위선을 폭로하십니다. 여기에 안식일의 원래 의도가 ‘하나님께서 구원과 해방을 통한 참 안식’을 약속하시는 것인 줄 모르고, 안식일의 의도대로 행하신 예수님을 나무라는 회당장을 부끄럽게 하시고, 이것을 지켜본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B. 본문의 문맥


1) 문단 나누기
대충 읽어도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체로 거의 모든 성경에 문단 나누기가 되어 있습니다. 간혹 동의하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본문의 흐름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은 맞습니다. 정 어려우시면 매일성경에 나온 본문의 개요를 읽으시면 전체적으로 전후 문맥을 파악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18-21절과 22-30절로 나눌 수 있습니다. 18-21절은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22-30절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좁은 길을 걸어가라는 요구를 하십니다.

2) 앞 단락과의 관계
우선 본문 내에서 두 문단은 모두 ‘하나님 나라’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엣것은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비유로 말씀하셨다면, 뒤엣것은 하나님 나라에 어떤 자들이 들어가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 나라의 비유는 앞 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본문도 18절을 ‘그러므로’라는 접속 부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가르치시고 병 고치신 일이 하나님 나라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는 본문을 해석하면서 드러날 것입니다.
저는 신학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관련짓는 데 그리 어려움을 못 느낍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둘 사이의 관계를 쉽게 찾기가 항상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매일성경의 해설란을 참고하시면 좋습니다. 혹은 좀더 여유가 있는 분이라면, 묵상을 할 때 간단히 참고할만한 책을 곁에 두는 것도 좋습니다. 너무 심각하게 성경을 석의해 놓은 책보다는 본문의 흐름을 보여주는 간략한 입문서가 좋습니다. 본문을 나름대로 해석한 후 그런 책을 한번 정도 읽으면 본문의 뜻이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C. 본문 해석과 적용

1) 18-21절
* 해석
: 예수님은 두 가지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하나는 겨자씨 한 알이고, 다른 하나는 가루 서 말 속에 든 누룩입니다. 둘 다 아주 작기 때문에 그 결과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또한 그 결과 또한 처음 시작과는 전혀 다를 정도로 대단합니다. 또한 둘 모두 그 안에 그렇게 할 만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둘 다 눈에 결과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데 심기거나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와 같다고 하십니다. 지금은 미약해 보이고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미약할 때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번성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지금 예수님은 놀라운 가르침을 전하시고 병을 고치시지만 알아주는 사람은 별로 없고 오히려 반발을 사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시작했는데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는 겁니다. 바로 앞에 나온 유대교의 중심에 있는 ‘회당장’이 그 경우입니다. 안식일 잘 지키면서도 정작 안식일 제도를 왜 지키는지는 몰랐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의 진정한 의도를 이루어 참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계신 예수님을 오해했던 것입니다.

* 적용:
-하나님, 레딩교회도 비록 작고 미약하지만, 주목을 받지도 못할 만한 교회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간직하게 하옵소서.
-이 교회를 통해 많은 분들이 생명을 맛보고 안식하게 하옵소서.
-올해 교인들이 많아졌습니다. 조금씩 자라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을 기억하시고 도와주십시오. 이번 주에 저희 교회가 기도하고 있는 러시아의 허춘강 선교사님과 함께 하시옵소서.
-저도 소신껏 이곳에 하나님 나라를 심게 하옵소서.

2) 22-23절 * 해석


예수님은 9:51부터 시작한 마지막 예루살렘 여정을 계속하시고 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죽음이 기다리는데도, 가는 길에도 곳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십니다. 아마 23절의 질문(구원을 얻는 자가 적습니까?)을 볼 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쉽고 간단한 것만은 아니라고 가르치신 것 같습니다. 다른 곳을 볼 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 지는 것을 요구하셨는데, 아마 비슷한 권면을 하신 듯 합니다.

* 적용
-공부와 사역을 같이 하는 게 힘들다고 오늘도 마음으로 불평을 했는데 죄송합니다. 주님처럼 마지막까지 하나님 나라를 전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해외 사역을 하시며 돌아다니시는 윤종하 장로님을 도와주십시오.
-어서 OOO, OOO 교인들이 주님을 영접하기를 원하지만 결코 값싼 구원을 전하지 않겠습니다. 에누리 없이 복음의 요구를 전하겠습니다.

3) 24절
* 해석
마태복음 7장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좁은 길’을 요구하십니다. 사람들은 넓고 큰 길, 즉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있는 길에는 많이 오지만, 오직 주님의 길을 따라 가겠다고 오는 사람은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특히 ‘힘쓰라’고 하시면서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책임을 강조하십니다. ‘힘쓰라’는 헬라어 단어(아고니조마이)는 운동 선수가 혼신의 힘을 다해 경주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이런 맘으로 따라 오라는 요구입니다. 이렇게 헬라어를 알면 좀더 예수님의 요구의 뜻이 분명해집니다. 그냥 ‘힘쓰고 노력한다’라고 해석할 때보다 훨씬 생동감 있는 해석이 되지 않습??까?
그렇게 지금 힘써야 할 이유는 이 기회가 영원하지는 않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끝이 있고 그 때는 들어오려고 해도 기회가 없다고 하십니다.

* 적용
-오늘 제가 가야할 ‘좁은 길’은 무엇입니까? 서운한 일 겪었지만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잘못한 부분도 있지만, 그 밖의 모든 것은 주님 손에 맡기겠습니다.
-주님, 말씀 사역자의 길을 갈 때,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이 내신 길만 따라 가게 도와주십시오.
-저희 아버지, 그리고 저희 교인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님을 영접하면 좋겠습니다.

4) 25-28절
* 해석
예수님은 예를 들어서 기회가 영원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한 번 문을 닫은 주인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습니다. 알면서도 모른 체 할 것입니다. 아무리 같이 먹고 마시고 주의 말씀을 거리에서 전하는 것을 들었다고 해도, 주인은 그들이 자기에게서 나간 사람인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후손들과 선지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있고 그들은 밖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회당장을 말합니다.

* 적용
-저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습니까? 주님 지금이라도 제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키고 싶습니다. 생각나야 할 죄가 있다면 알려 주십시오.
-‘길거리에서 (주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들어도’(신학교에서 배워도) 저를 모른 체 하실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을 듣고 두렵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많이 듣고 공부하고 또 전하고 살아도 당신께 외면 당할 수 있겠군요.
-같이 ‘먹고 마시고 말씀을 듣는’ 교인들이 모두 당신에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결코 교인인 것으로 만족하는 저희들 되지 않게 하소서.
-기독교 정당이 더욱 한국에서 주의 교회를 어렵게 할 것 같습니다. 간섭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아닌 것 같습니다.

5) 29-30절
* 해석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자처하던 유대인들은 영접 받지 못하지만, 동서남북에서 온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먼저 되었지만 결국 나중이 되었고, 이방인은 나중이었지만 먼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앞에 나온 회당장과 18년된 병자를 비교합니다. 둘의 운명은 예수님에 대한 태도 때문에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 적용
-저희 교회는 각지에서 모였습니다. 주님, 모든 분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다 처음된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제가 교회에서 가르친다고 교만한 자리에 서지 않고, 늘 예수 그리스도를 리더로 모시고 살게 하소서.


3. 정리하기

 

어떻습니까? 사실 적용은 평이하고 개인적인 것이 많지만, 그 적용이 본문의 해석을 거친 후에 나왔기 때문에 커다란 비약이나 본문 왜곡으로 흐르는 것을 피할 수 있습니다. 제가 교회의 지도자 입장에 있기 때문에 다른 면보다는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더 깊게 살폈습니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기록하였지만, 26절에서 ‘길거리에서 가르치는 것을 듣더라도’ 예수님이 모르신다 할 수도 있다는 말씀을 적용할 때는 더 깊이 더욱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저의 여러 태도를 점검하였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1차 독자에게는 꼭 그 구절에서 그렇게 시간을 많이 할애하라고 이 글을 쓴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1차 독자의 상황과 저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본문의 큰 흐름 안에서 -문맥에 따르면 이 경고는 앞에 나온 회당장 같은 종교지도자들을 염두에 둔 것이기 때문에-개인적인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에 더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자연스럽고 또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설명을 하려다 보니 해석을 좀 자세하게 실었습니다만, 실제 성경묵상을 할 때는 큰 틀만 유지하고 세세한 해석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으로 이런 해석이 제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이같은 적용이 나온 것은 분명합니다. 해석 없는 적용은 없기 때문입니다. 제 해석도 많이 부족하고, 특별히 참고서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줄거리 파악 수준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평소에 이 본문의 의미에 관해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면-설교를 들으셨거나 그룹 공부 혹은 관련 서적을 읽음으로써- 짧은 시간의 묵상일지라도 훨씬 풍성한 적용을 이끌어 낼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저는 헬라어를 볼 줄 알기 때문에 그러지 못한 분들보다는 거기서 얻는 유익-'힘쓰다'라는 단어나 문장의 시제나 문장 안에서 강조하여 읽어야 할 부분 등-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적용은-무의식 중에라도-해석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드렸습니다. 하지만 또 잔소리 하나 하지요. 앞으로 수없이 반복할 겁니다. 그것은 본문의 해석, 즉 본문과 나 사이의 간격을 극복하는 일보다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간격을 극복하는 것이 성경묵상에서는 더 중요하기 때문에, 설령 본문의 뜻을 이런 저런 이유로 잘못 이해하는 바람에 본문에 충실한 적용을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만약 마음만 하나님께 향하여 있었다면 그 적용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든지 용인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해석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학자들의 오류 뿐만 아니라 목회자들의 오류도 포함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성도들을 양육하고 자기 백성을 구원으로 부르셨고 또 지금도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니 해석을 잘못할까 두려워 아예 성도 스스로 묵상을 하지 못하도록 가르친다든지 혹은 그런 말을 귀담아 듣고 늘 남이 해석해주는 것만 의지해서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실수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선 자기 마음만 잘 살피고 늘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태도와 건전한 상식만으로 본문을 대한다면 결코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보다 풍성한 묵상을 위해서는 평소에 성경공부나 설교를 통해서 좋은 성경해석을 접하는 것이 좋습니다. 바른 성경 해석을 사모한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참 수고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겁나게 재미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는 일 아닙니까? 이런 태도가 체질화될수록 성경묵상은 조금씩 깊어질 것입니다. 글:박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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